역사 & 인물

정릉(貞陵)과 興天寺에 얽힌 悲話

H극동 2013. 7. 23. 20:38

 

 

 

 

 

 

 

 

 

 

 

貞陵과 興天寺에 얽힌 悲話                             사진.편집/죽암 장석대. 

 

        ※ 이 능에는 조선왕조를 창건한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황후 강씨가 묻혀 있다.   

 

 

  ※ 貞陵(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태조 정비(正妃)는 조선왕국이 창건되기 전에 승하 하였기 때문에

                        정릉에 묻힌 태조의 계비 신덕황후가 사실상 조선의 국모(國母)이다.

 

     逸話 1. 태조 이성계와 신덕왕후 강씨의 인연

         태조 이성계가 젊었을 때 호랑이 사냥을 하다가 목이 말라 우물이 있는 인가로 내려갔는데 마침 우물가에 

         한 여인이 있어 "낭자, 내 목이 매우 마르니 물 한 바가지 좀 떠 주구려" 하고 청하자, 그 여인은 바가지에

         물을 뜨고서는 버들잎 한 줌을 물에 띄어 주는 것이 아닌가. 화가 난 이성계는 "아니 물을 떠 주려거든 그냥 

         줄 일이지 이게 무슨 고약한 짓인가?"하고 나무라니, "제가 뵈옵기에 갈증으로 급히 달려 오신 바, 냉수를

         급히 드시면 탈이 날 것 같아 버들잎을 불며 천천히 드시라고 일부러 그리 했나이다." 이 말을 듣고 내심    

       감탄한 이성계는 그 여인의 지혜에 놀랐고, 그 화용월태(花容月態)에 놀랐다고 한다.

 

           逸話 2. 200여 년만에 신덕황후의 恨이 풀리는 날 洗寃之雨가 내리다. 

           1669년(현종 10년)11월1일,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렸다. 가을 단풍의 화려함도 다 시들어 버리고 

           찬바람이 불고 겨울로 성큼 다가선 11월 첫 날, 걸맞지 않게 아침부터 내린 비는 오후가 다 되도록

           그칠 줄 몰랐다. 몇 달 전부터 계속된 정릉의 정자각도 이제 완공이 되었고, 九泉에 떠돌던 신덕왕후의

           신위(神位)가 200여 년만에 태묘(太廟)에 배양되는 날이었다. 그런데 유독 정릉 일대에만 때아닌 많은

           비가 내리는 것을 두고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있었다. 

            "오늘은 신덕왕후가 가슴 속 깊이 맺힌 한을 푸는 날이야. 그러길래 이렇게 비가 많이 내리지. 200여 년

            동안 쌓인 한이 풀리니 오죽할라고." 사람들은 이날 내린 정릉 일대의 비를 세원지우(洗寃之雨)라 했다.   

 

       ※ 신덕왕후의 한(恨)은 무엇인가.     

             태조 이성계의 다섯 째 아들 방원(芳遠=태종)이 아버지가 승하 하자 신덕왕후가 살았을 때, 正妃의 왕자들은

             제쳐두고 계비 신덕왕후의 아들인 방석(芳碩)을 세자로 책봉한 데 대한 감정으로 신덕왕후의 능을 까뭉게고

             신덕왕후의 신주를 태묘에 배향하지 않아 200여 년동안 임자없는 구천에 떠돌아 다닌 한이었다.

             게다가 신덕왕후의 정자각을 헐어 목재와 석재는 각각 太平館을 짓는데 썼으며, 그해 청계천의 廣通橋(현재의

             廣橋)가 홍수에 무너지자 정릉의 석재 중 병풍석을 관통교 복구공사에 사용케 했다.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을 지닌 정릉은 성북구 정릉동 산 87-16번지에 있다.

           

         그러나 1398년(태조7년) 芳遠(후일에 태종)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신덕왕후의 소생의 아들 芳蕃과

         芳碩을 무참히 죽였으니, 만일 신덕왕후가 살았을 때 이 일을 겪었으면 이보다 더 슬픈 恨이 어디 있었겠는가.       

 

                                           ▲ 神德高皇后碑

 

 

 

 

 

                                                           ▲ 정릉관리사무소.

 

    興天寺

         여기 흥천사는 태조가 신덕황후 강씨의 명복을 빌어주기 위해 지은 원찰(願刹)이다. 

             願刹이란 창건주 자신의 소원을 빌거나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세우는 사찰을 말한다.

 

              태조는 사랑하던 강씨가 1396년8월13일 세상을 떠나자 개국공신들의 주장대로 국모를 높이는 뜻에서

              공신수능제(功臣守陵制)를 채용하고, 도성 안 皇華坊 北原 현 貞洞에 능을 조영하였다. 그리고 願刹로

              능 동쪽에 170여 간의 興天寺를 세워 조계종의 본산으로 삼았다.  

       

       

                                         ↑ 極樂寶殿

 

              이 절은 원래 정동에 있었는데 연산군 때 불타 폐허로 있던 것을 1794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용주사를 창건한 적이 있는 정조가 승려 聖敏 敬信의 뜻에 따라 현재의 위치에 지었다고 한다.

 

          태조는 대궐에서 정릉의 아침 제 올리는 종소리를 듣고서야 수라를 들었고, 이 흥천시에 자주 들러

            법도를 마련했다고 한다. 그러나 태조가 매일 아침마다 종소리를 들었던 이 흥천사의 대종은

            1504년(연산군 10년) 12월의 화재로 절이 불타고 1510년(중종 5년)에는 사리각까지 불타 그 대종은

            동대문, 홍인문, 광화문의 종루, 일제때는 창경궁, 다시 덕수궁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 貞陵과 興天寺에 얽힌 사연들을 조명해 보느라 전에 못 다배운 역사공부 좀 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우리의 한민족의 권좌 다툼은 우열을 가릴 수 없지만, 단종애사,

                  사도세자, 방원이 저질은 왕자의 난을 볼 때, 세습군주국에서 빚은 권력의 잔인성은 

                  이조 오백년사의 역대 왕들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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