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고향 생각

부산영도다리 의 유래

H극동 2012. 4. 1. 17:59

 

 

 

 

 

 

 

 

 

 

 

 

 

 

 

영도다리


  영도다리[影島橋]로 더 잘 알려진 영도대교(개통 당시에는 부산대교였음)는 부산 본토와 유인도인 영도 사이를 연결하기 위하여, 1932년 3월 8일 착공 1934년 11월 23일에 개통된 부산 최초의 연륙교이다. 그 중 부산 내륙측은 31.30㎝를 도개교로 하여 1,000톤급 기선의 운항을 가능하도록 건설되었다. 그 밖의 부분은 캔틸레버식 강판항교로 하였다. 그리고 항교 아래로 만조시 50톤급 이하의 기선이 자유로이 운항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의 화폐로 총공사비 70만8천원이 투입되었다.

 

1934년 완공당시 모습

  영도다리는 민족의 애환이 짙게 묻어 있다. 일제의 가혹한 수탈에 많은 사람들이 투신하기도 했고, 8?15 광복과 한국전쟁 때는 생활고에 지친 피난민들이 다리 난간 위에 비친 초생달을 보며 하염없는 향수를 달랬던 곳이다. 한국전쟁 피난시절 ‘굳세어라 금순아(강사랑 작사, 박시춘 작곡, 노래 현인)’라는 대중가요는 피난민들의 심금을 울리며, 이산가족과 실향민들에 의해 애창곡으로 불리

우기도 하였다.

 

 1.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를 가고 길을 잃고 헤매이더나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이후 나홀로 왔다


 2.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 내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꿈도 그리워진다

   영도 다리 난간위에 초생달만 외로히 떴네


 3. 철의 장막 모진설움 바꿔 살아간들 처지간에

   너와 난데 변함이 있으랴

   금순아 굳세어라 남북통일 그날이 되면

   손을 잡고 울어보자 얼싸안고 춤도 추어보자


  이 노랫말은 1950년 한국전쟁 때 38선 돌파 후 폭풍처럼 압록강까지 북진하는 유엔군 앞에서 인민군은 사실상 저항을 포기하였다. 대부분의 전투는 총격전이 아니라 일방적 후퇴였다. 이후 중공군의 개입과 인해전술로 유엔군은 후퇴를 거듭하여 1951년 1월 4일 서울이 다시 인민군 수중에 들어갔다. 평양 철수, 흥남 철수 등 1?4후퇴로 해서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이산가족의 비극이 빚어진 것이 이때였다. 이 노래는 흥남 철수 당시 부두에서의 당시 나이어린 금순이를 잃어버리고 부산에 홀로 온 화자가 ‘피눈물을 흘리며’ 금순이를 애타게 찾고 있는 내용이다.>

 

 

  

1954년 당시의 영도다리 도개 모습

 

  2003년 11월 영도구청에서는 영도다리 끝자락에는 ‘영도다리 기념표석’과 ‘가수 현인 노래비(가로. 세로 각각 4m, 높이 3m)’가 부산을 상징하는 바다와 항구가 어우러진 배의 형상과 음반, 파도, 음표와 함께 갈매기가 나는 모습 위에 ‘굳세어라 금순아’의 노랫말이 새겨져 있다. 노래비 바로 앞에는 현인 선생이 앉아서 노래하는 모습의 1.2m 동상이 세워져 이곳을 찾은 시민들이 노래비를 감상하며 기념촬영도 할 수 있다.

  이곳 다리에서 자살자가 속출하자 ‘잠깐만’이라는 팻말이 곳곳에 붙여지고 경찰관이 배치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의 경제수탈 및 학정과 1950년 한국전쟁의 비극을 말없이 지켜본 영도다리는 피난민의 숱한 애환과 이야기만 남긴 채, 1966년 8월 31일 하늘로 치솟던 마지막 도개를 끝으로 9월 1일부터는 폭주하는 차량통행으로 도개를 폐쇄되어 기능이 멈추자 옛 모습을 잃어 버렸다.

  영도다리는 교량 뿐 아니라 영도다리를 구성하는 건축물들도 건축적인 가치를 보여주고 있다. 교대는 정교하게 다듬어진 화강석으로 바른 층 쌓기를 하여 교대를 형성하고 모서리 돌은 직사각형 화강석으로 모접기 등을 하는 등 정교한 디테일을 갖고 있다. 영도다리의 교대 좌우측에 있는 화강석 계단, 교량 입구의 교문주와 난간 등은 영도다리의 구성미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으며, 교량 입구 광장인 다리목 광장은 영도대교의 얼굴에 해당하는 공간으로 근대 교량의 형식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다. 영도다리는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단엽식 도개교로 희소가치가 매우 높은 교량이며, 일반적인 도개교와는 달리 안벽부에 도개장치를 설치하고 있는 등 도개교량의 형식에서도 특이성이 인정되는 등 우리나라 근대 교량사를 연구하는 데에 대단히 중요한 교량으로 보존가치가 매우 높다고 하겠다.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6호(2006. 11. 25)로 지정되어 보존 ?관리되고 있다.

영도다리 복원후의 조감도

 

  영도다리는 교통량의 증가와 노후한 교량을 철거하고 새로운 교량을 건설하자는 주장과 우리의 근 현?대사의 아품을 간직한 시설물로 역사의 현장으로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부산시에서는 전문가와 시민들의 여론 조사를 통하여 부산시 지정 기념물로 지정하여 보존키로 최종 결정하였다. 이후 부산시는 영도다리를 전면적으로 해체하여 다리를 들고 내리는 도개기능 복원으로 도개모습을 다시 볼 수 있도록 하여 부산의 새로운 명소로 재탄생하게 된다.

영도다리 복원후의 도개모습(조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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