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인물

의열단-단장이었던, [김원봉]선생에 대한 얘기

H극동 2010. 12. 27. 23:06

 

친일(親日)~숭미(崇美)파와 일제에 대한,

한국-투혼(鬪魂)정신인 자존심으로 본 항일고찰,

 

 

 

항일비밀결사대-의열단-단장이었던, [김원봉]선생에 얘기.

 

1939.10.10날에 중국-광서-장족-자치구(광서성) 계림에서 찍은 조선의용대-창립 한 돌 기념사진. 가운뎃줄 왼쪽에서 14째가  [김원봉/약산]. 오른쪽 위는 조선의용대-명찰.


중일전쟁이 한창인 1938.10.10날에, 한구(漢口)에서 조선민족전선연맹이 무장부대로 발전하여, 조선의용대로 창설되었고, 의용대장-대장에 [김원봉]선생, 부대장에 [신악]선생이 추대되었다. 처음으로 창설된 조선의용대에 수는 약 300여 명에 대원으로써, 3개-지대와 부녀대와 3.1소년단으로 편성됐다. 조선민족전선연맹은 조선민족혁명당(김원봉), 조선민족해방운동자동맹(김성숙). 조선혁명자연맹(유자명/유림) 단체들과 조선청년전위동맹이 합쳐, 결성된 연합체였다.

http://image.ohmynews.com/down/images/1/sicho_236154_8%5B351049%5D.jpg

( 맨 처음, 조선의용대-대장인 때에  찍었던, 젊은 모습)

 

=[들머리]=

김원봉(金元鳳/若山)선생은  밀양에서1898.8.13일에 태어나신. 위대한 조선독립-항일비밀결사대-단장이시다. 일제침략이 고도에 이르는 시기에, 조선이 독립을 지키기에 위해, 대단히 어렵게 된 시련기였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1948.6.29~7.5일까지 평양에서 개최되었던 남북-제 정당, 사회단체-연석회의에 민전(民戰/민주주의민족전선)-대표로 참석(4.9)했는데, 연석회의가 끝났는데도 남쪽으로 되돌아오지 않고, 평양에서 국가검열상(장관)과 노동상(장관)을 역임하다가, 1958.11(?)인 말경에 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회, 부위원장-직을 끝으로, 생사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바로 그 해로부터 올해가 52년째가 되는 해입니다.(줄임)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가족]-

모 : 이경념(李京念, 경주이씨, 다른 이름은 월향, ? - ?)

동생 : 김경봉

여동생 : 김씨

계모 : 천연이, 영양천씨(생 9남 1녀)

남동생 : 김춘봉

남동생 : 김익봉

남동생 : 김용봉

남동생 : 김봉철

남동생 : 김봉기

남동생 : 김덕봉

남동생 : 김구봉

남동생 : ?

누이동생 : 김학봉

남동생 : 김봉철

처:박차정(1909~1944)

처:최동선

아들: 김중근

아들: 김철근[44]

삼촌: 김주오

사촌: 김태근(金泰根)

고모부: 황상규

고종사촌 : 황용암(黃龍岩)

사돈: 최기일[45]

김원봉과_박차정.jpg

(박차정-여사와 결혼한 기념사진)

첫 부인은 유명한 여성 독립운동가로 조선의용대에서 부녀복무단-단장을 지낸 [박차정]여사로 1931년에 결혼하였으나, 1939년 장시-성에서, 일본군과 전투할  때에 입은 총상-후유증으로, 1944년에 충칭에서 병사했다.  두 번째 부인 역시 조선의용대 출신의 [최동선]여사이다. 최동선여사는 2아들을 낳았는데, 큰 아들은 김중근(1945년~)씨고 둘째는 김철근(1947년~)씨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 42살이 된, 첫째 [박차정]여사)

- 1898년에 경남 밀양 출생

- 1911년에 일장기를 변소사건으로 밀양공립보통학교 자퇴하고 동화학교로 전학

- 1912년 표충사에서 수도하면서 독학

- 1913년 서울 중앙학교 편입학

- 1916년 중국 천진 덕화학당 입학

- 1918년 남경 금릉대학 입학

- 1919년 만주로 가서 신흥무관학교 입학했다가 자퇴하고 길림에서 의열단 창단

- 1923년 단재에게 ‘조선혁명선언’ 집필 부탁

- 1926년 의열단원 나석주 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 투척

- 1927년 중국공산당 남창 봉기 참가

- 1931년 박차정과 결혼

- 1938년 조선의용대 창설하고 대장에 취임

- 1942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조선의용군으로 개편

- 1944년 임시정부 군무부장 취임, 아내 박차정 사망

- 1945년 최동선과 재혼, 건준 임시내각 군사부장 취임

- 1947년 수도경찰청 수사국장 노덕술에게 체포

- 1948년 월북, 남북연석회의 축사 및 사회, 국가검열상 취임

- 1952년 노동상 취임

- 1958년 회갑을 맞아 훈장을 받고, 10~11월에 숙청(?)


- 남쪽에서도 가족들 가운데,  남동생들은  보도연맹사건으로 미군과 <이승만>국방군에게  거의 다 체포되어, 사살을 당했다. 그 가운데서 유일하게 여동생 학봉(1932년~)씨와 남동생인 [봉철]씨가 생존해있다.

 

 

 

 

 [사진]: 1945.12달에 귀국하기에 앞서,

기념사진을 촬영한 임시정부-요인들.

맨 뒷줄 오른쪽 2번째가 [김원봉]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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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제국이 1940년(昭和15년) 3월에 고등법원검사국 사상부에서 비밀문서로 작성된, 사상휘보(思想彙報)제22호에 따르면, 【김원봉은 당-분열방지와 청년층 획득을 위하여 40.7월 초순 중국군사위원회에 대하여 민족전선연맹에서 청년분자들로 조선의용군이라는 것을 조직하여, 여러 전투구역에 배속시킴으로써, 제일선공작에 진출하고 싶다는 희망을 제안하였으나, 군사위원회에서는 조선민족단체 전부가 가맹한 활동을 전제조건으로 삼아, 이를 허용할 수 없다는 뜻으로 회답을 하였다. 그래서 약산은 즉시 전시복무-단과 김구(金九)파인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에 대하여, 그 취지를 전달하고 통일당조직에 협력할 것을 요청했는데, 김구-측은 이를 거절하였으나 최창익이 이끌던 전시복무-단은, 그 시기에 경제문제로 고심하던 중에 있었음으로, 즉석에서 이를 찬동하고, 9월에 단일화하여 조선청년전위동맹이라고 개칭했다 그 뒤로부터 중국군사위원회에서도, 조선의용대조직방안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라고, 적어놨다.


무창(武昌)-동호반(東湖畔)조선청년-항일무장단체:

http://pds17.egloos.com/pds/200911/21/75/f0020275_4b070b68539d0.jpg  

1911.6.2일에 한구(漢口)에 도착했고, 6.3일에는 다시 양자강(楊子江)을 건너 무창(武昌)-장지동(張之洞:지금 자양로 234호) 에 있는, 대공중학교(大公中學校:현,湖北省總工會)에 도착하여 주둔하였다.  


이 대공중학교는 1911년도에 손문(孫文)이 신해혁명에 일으킨 지역으로써, 신해무창기의공정영발란처(辛亥武昌起議工程營發難處)-라고 하는, 역사적인 곳인데, 1912년에 세운 중화민국-수도인 남경이 함락되자 일본군침공에 대비하여, 학교전체가 흥산(興山)으로 이전해 버리고, 학교가 비워져 있을 뿐만 아니라, 인근에 있던 무창실험소학교(武昌實驗小學校/兩湖書院)구내에 중앙군관학교인 무한분교(中央軍官學校 武漢分校)가 자리하고 있는 곳인데, 장개석-군벌을 비롯한 국민당지도부도 역시 동호반(東湖畔)에 위치한 무한대학교(武漢大學校)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한 때에도, 민족전선연맹에서 민족혁명당 지도부인 [김약산~박차정부부, 조선청년전위동맹에 최창익~허정숙부부, 조선민족해방동맹에 김규관과 두군혜부부, 조선혁명자연맹에 유자명~유칙중부부들이 양자강-북쪽 무한항(武漢港)-부근에 있는, 일본조계813가(승리가15호)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특히 엽검영(曄劍英)~동필무(董必武)를 비롯, 나중에 팔로군-지도부가 될 분들도 함께, 이 부근에서 생활하고 있었다고 한다.

-(줄임)-


- 그 뒤로, 김원봉(약산)선생은 1944년도에 임시정부-군무부장으로 취임했고, 광복군0제1지대장과 부사령관으로 역임하였으며, 일제가 2차대전에서 패망한 그해, 1945.12달에 임시정부 요원들이 귀국할 때에, 군무부장-자격으로 귀국했었다.

[사진]: 1940.9.17날에, 중경-가능빈관에서 개최된 [광복군총사령부]가 성립된 전례로. 단상에 임정 [김구]국무령과 [김학규]총사령부-참모들이 모여, [백법]이 선언문을 낭독, [조소앙]선생이 경과보고, [홍진~조완구]선생들이 축사, 중국요인들도 격려사와 축사하는, 순서으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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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미국-군사식민통치인 때에 [장택상]은 [김원봉을 반드시 잡아오라!]-라고 고함을 쳤다. 그러니까는, 1947.4.9날이 돌아오기 전에, 미군정이 군정포고령 위반을 하였다며 압류하였다가 풀어준 곳이 인민공화당-사무실이었다. 조국광복을 위해 큰 꿈을 안고 의열단을 창단하여, 22살부터 해방을 맞아 귀국한 48살에 이르기까지,  26년 동안이나, 일본제국군과 끊임없이 싸우면서도, 일제군한테 잡힌적도 없고, 또한 그런 수모를 한 번도 당해보지 못했던, 수모와 부끄러움이였다.

 

-[*참고]-

장택상(張澤相/滄浪)초대-외무부장관: [이승만-(48.6.8일, 첫 국무회의]

(좌익박멸)멸공선봉장-숭미주자였던, [장택상]에 삶,

출생 : 1893, 경북-칠곡, 안동-장씨 가문, 
직업:1893.10.22~1969.8.1까지 경찰관~외무부장관~국무총리, 
학력 :  영국 에든버러대 중퇴
경력 : 제5대 민의원(무소속, 칠곡)
* 재일교포-북송반대, 제네바-파견과 반공(반북)투쟁위원장,
 

* 1893.10.22: 경상북도-칠곡-북삼읍-오태동에서  장석용(張錫龍)판서에 손자이며, 장승원-관찰사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칠곡-여헌 장현광-후손. 자는 치우(致雨) 호는 창랑이다.

1900: 7살로부터 한학을 수학,

1903: 10살인 때는 사서삼경~한사~당송팔대가~외교사들을 통독하였다고 한다.

11901: 경성으로 상경, 우남학회가 운영하는 한성소학교에 입학, 신학문을 수업하였다.

1908: 15세에 일본으로 유학, 일본의 소학교를 거쳐 16세때 조도전 대학에 입학.

1910: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으며, 러시아로 갔다가 군항인 해삼위에 도착하여 이상설(李相卨)선생에 권유와 주선으로 영국행을 떠남, 19살인 때에 중국-상해와 독일을 경유, 영국에 도착해 유학,

1919: 에든버러대학교-경제학과에서 중퇴하고, 청구회-회장을 지냄

1926: 25살에 미국에 건너가, 이승만~조병옥들과 함께 구미외교위원회-위원으로 활동함,

--- * --

1930: 29살인 때에, 영국-거주지에서 귀국하였다.

1945.7: 이승만단독정부-조각에서, 초대외무장관에 장택상(張澤相).

1958: 제4대 총선거에 재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1958: 반공투쟁위원회-위원장에 피선되었으며, 일본이 동포들을 북쪽으로 북송하자 재일교포북송반대-전국위원회에 가담,

1959.3.8: 재일교포북송반대-전국위원회-민간대표로 유진오와 같이 스위스-제네바에 다녀왔다.

1959: 이승만정권에서 조봉암이 사형선고를 받자 구명운동. 그는 조봉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조봉암-구명운동은 실패했다. 

1945: 이후로 경찰청장으로 <좌파(좌익)세력-검거>에 앞장섰었다.

1960: 제5대국회의원선거에 다시 무소속으로 경북-칠곡에서 출마하여 재선되었고, 6차UN총회참석에 다녀왔다.

1961: 박정희-군사정변을 일으키자 시흥별장에서 은거, 5.16 뒤에 박정희가 한민당~자유당~민주당들에서, 구정치인을 정계에서 배제하자, 박정희-정권을 반대한, 반독재-야당지도자로 활동했다.

1963.9: 자유당총재로 선출됨.

1963.11: 제6대민의원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

1964: 박정희-한일회담에서, 범국민운동으로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가 발족되자, 거기에  참가하여,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위원장을 역임,

1966.2: 신한당-고문이됐다.

멸공-선봉장이자, 숭미주의자였던 [장택상]은 구미시-오태1동에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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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gif

-(전고(제2호)-조선의용대에서 발행하는 잡지표지)-

 

엄청난 현상금을 걸고, 끈질기게 추적해 오는 왜경이었으나 한 번도 잡힌적이 없었던 김원봉선생은, 역시 빼어난 혁명가이였다. 그러나 해방되었다는 조국에서 점령군으로 들어온 미군지휘를 받는 친일파-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른바 좌익이라는 딱지를 붙여 사상범으로 체포했다. 이로부터 독립투사들이 다 그런식으로 체포됐다. 말하자면 미군식민통치(45.9.8-인천침략)에 협력하지 않고, 반항하기 때문이다. 그래 일제식민지시대에 일제군과 싸운 애국지사들이, 미군정-식민통치에서 또다시 수난이 시작됐다. 문제는 일제강점시절에 사상과 이념이 어쩌든 ,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서, 찬바람이 불어, 눈보라치는 엄동설한도, 풍찬노숙하면서 굴함없이 혈투로 싸워지 않은가?  그런데도 [김원봉]의용군-대장까지,  친일파와 친미파들에게, 체포되어 인간이하에 모욕과 함께, 심한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 도데체 식민지시절에 왜놈들한테도 그런 수모를 당하시지 않았다.


김원봉선생이 철창에 갇혀있는 동안에, 두 번째 아들을 얻게 되었는데, 철창에 갇혀있을 때에 태어났다고 하여, 이름을 철근(鐵根)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꼬박 통곡하였다고 한다. 민족자주연맹-대표였던 송남헌(宋南憲)이 쓴 [해방 3년사]에 따르면,  그때 상황이 생생하게 그러졌다.

 

김원봉선생을 붙잡아 간 자가, 바로 노덕술(盧德述)이었다. 노덕술은 일제식민지인 때에 조선총독부-종로경찰서-형사로 있으면서, 독립운동가 붙잡아다가, 악랄하게 고문을 했던, 악질적인 친일-경찰이었다. 그는 또한 김원봉선생이 거느리던 항일결사-의열단임원들을, 칠가살(七可殺)-명단에 올라 있던, 그런 흉악한 [친일-친미]-매국노였다.

또한 미군정과 [이승만]군방-군에게, 김원봉선생에 남동생들은 대부분이 보도연맹-학살사건으로 총살당했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여동생인 [학봉]씨와 남동생 [봉철]씨가 생존해있다. 그때로부터, 빨갱이-가족으로 낙인찍혀, 온갖 수모와 함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알려졌다.

[참고]: 노덕술(盧德述, 일본식 이름: 松浦鴻, 1899년 ~ 1968년)은 일제 강점기와 미군식민통기간에서부터 <이승만>정권 경찰간부였다. 그는 일제강점기때 고등계형사로써, 악질적인 친일경찰로 이름을 날링 자다, 해방이후 대한민국정부 수립때 수도경찰청-간부로 활약했다, 이때에 <이승만>이 노덕술을 보고, [반공투사]-라고 극찬을 했다. 그러나 1949년에 반민특위로 체포된바 있었으나, 반민특위 해체로 풀려나 경찰직에 다시 복귀된 뒤에도 대한민국 경찰직에서 고위간부로 두루두루 지내며, 호사를 누렸다. 일제시절에, 노덕술은 스스로 창씨를 개명했는데, 마쓰우라 히로 (松浦 鴻)-라고 했다.


1920-경남 순사교습소를 졸업, 경상남도 경찰부 보안과를 시작으로 경찰 근무를 시작하여, 울산경찰서 사법계에 근무하면서 순사부장이 됨.

1924-경부보로 승진하여 의령~김해~거창~통영경찰서들에서 사법주임을 지냄,

1927-경찰, 비밀결사조직 혁조회(革潮會) 수사를 담당,

1928-10: 박일경-검사를, 취조함,

1929~1930: 동래경찰서 사법주임으로 재직 당시, 동래고등보통학교 맹휴사건과 조선인 일본 유학생들, 하기휴가 이용, 귀국한 강연회사건을, 수사담당,

1932.5-통영경찰서 사법주임 재직, 독립운동가 김재학(金載學)을 고문 취조

1934.9-평안남도 경찰부 보안과장으로 승진,

1948.1.24-임화(任和) 박성근-수도경찰청장이었던 장택상을 암살하려다 미수하고 체포되었는데, 노덕술-부하였던  김재곤~박사일들이 [박성근]을 고문하다가 1.29일에, 사망케 했다.

1949.1.24-반민특위 요인들 암살음모-혐의로 체포됨,

1949.1.26-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석방을 요청, 반민특위는 그 요청을 거절,

1950-육군본부에서 범죄수사단장으로, 대공-업무를 담당.

1956-고향 울산으로 칩거,

1960-국회의원 선거에 출마-낙선,

1968.4-서울대학교 병원에서 병사.

 

일본제국이 힘이 막강해진 그때에 항전하기 위해선,

[김원봉]선생은 달리 선택할 길이 없다고 본다.

그러기 때문에 조선의용군-선발대가 중국공산당-군과 연합해서라도,

항일전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국민당이 백번을 양보해, [광복군과 통합하라]-는

그러한 기회가 주어진 때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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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대목]=

[1]. 김원봉(金元鳳/若山)선생이 항일독립-비밀결사대-의열단조직고찰-애기(실화소설)

[2]. 의열단항일독립비밀결사대조직결성(義烈團∼抗日獨立秘密 決死隊組織結成),

[3]. 의열단∼조직공약(義烈 團 組織公約),

[4]. 의열단∼비밀결사대임무(義烈 團 秘密 決死隊 任務),

[5]. 의열단∼투쟁강령(鬪爭綱領),

[6]. (글쓴이)~맺음말(評價結論),

 

 

[1].김원봉(약산)에 항일독립-비밀결사대-의열단조직고찰-애기

김원봉(金元鳳:1898.8.13(음력)∼1958(?)해에, 경남-밀양지역에 사는, 아버지인 김주익(金周益)옹과 어머니인 월성이씨(月城 李 氏)여사, 사이에서 태여 나셨다.


김원봉-선생에 딴이름은 약산(若山)이라고 했다. 12-살(1910해) 때에 고향에서 [돈화중학]-2년에 편입하였다. 돈화중학교장인 전홍표(全鴻杓)선생은 항일사상이 대단한 분이셨다. 어린 때에, 이 학교에서부터 항일에 대한 분노-심을 배웠고, 무전여행을 많이 했으며 또한 책도 많이 읽었다. 나이를 먹어 철이 들수록, 일본이 나라를 침략하고 있는데 대하여, 늘 가슴아파했다.


1916년에 18살이 되었는데, 봄에 고국을 떠나 쭝궈-천진[中國 天津]으로 가서, 독일인이 세운 [덕화당]에 입학했다. 공부를 해서 일본과 싸우겠다는 결심이었다. 그럴면 쭝궈(중국)글과 말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천진-행(天津行)으로 갈 여비는 평소에 존경해 왔던, 한봉수(韓奉仁)선생이 마련해 주시었다.,


그런데 이 때에 쭝궈(中國)은 연합국-측에 가담한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독일인들이 추방당하여, 덕화당도 폐쇄되고 말았다. 그래서 1917해에 고국으로 되돌아왔다. 이때에 [안동현]에서 손일민[孫逸民]과 김좌진[金佐鎭] 그리고 김약수[金若水]선생들을 사귀었다.


그 가운데, 일본제국과 싸울 것을 결의했는데, 김약수[金山]과 이여성[靑汀] 그리고 김원봉[若山], 셋이서 똘똘 뭉쳤다. 자금은 [김산]과 [청정]이 준비해서, 1918.9달에 서울을 떠나 쭝궈-남경으로 들어가. 셋이서 금릉[金陵]대학에 들어갔다.


파리강화회의(1918.12)가 열렸는데, 여러 나라대표가 참가했다. 이때를 틈타, 파리-일본제국대표인 사이오지[四園寺公望]을 저격암살하기로 결의하고, 김칠성[金鐵城(金一)]과 함께 권총을 보자기에 쌓아, 바지를 입은 허리에다가 둘러찼다. 그렇게 차림을 하고선, 파리회의장-근처에 와서, 3일간 조선인 교포-집에서 투숙했다.


드디어 강화회의가 열리는 날이 왔다. 둘이서 권총을 쌓아둔 보자기를 풀어 보았을 때에, 같이 쌓아 두었던 여권과 돈-뭉치만 있을 뿐,  권총이 보이질 않았다. 깜짝 놀랬다! 둘은 어쩔 줄 모르도록 당황하였다. 권총과 여권을 입수하기까지 갖은 애를 쓰고 또한 쭝궈-남경에서부터 이곳 프랑스-파리까지 천신만고 끝에 찾아왔는데, 권총을 도적맞아 거사가 모두 망가지게 됐다. 그동안 천신만고 끝에 이곳까지 잠입해온 노력이, 모두가 다 허사로 되고 말았다. 아무래도 주인동포가 의심이 갔지만, 어쩔 수 없는 둘은, [넋을 잃고 맥이 풀린 채,] 풀이 죽어 남경(南京)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1919해에 약산은 21살이었다. 이때에 3.1-운동이 국내에서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흥분과 감격으로 '껑충껑충' 뛰며 기뻐했다. 이때였다. 길림[吉林]에 있던 김약수[金若水]로부터 남경-봉천[奉天]으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약산은 이여성과 함께 봉천[奉天]으로 가는 도중에, 제남[齊南]에서 묵었는데, 거기서 신문에 난 3.1운동-독립선언서를 읽었다. 약산은 실망했다. 선언문-내용이 일본제국과 직접 싸우자는, 그러한  무장투쟁-내용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단 한줄에 문구도 없었다. 그러한 독립선언문을 읽은 약산은, 너무나 허탈해졌다.


약산는 [봉천]에 와 약수를 만났다. 약수는 말했다. [휘문중학-교장]인 박중화[朴重華]로부터 빨리 귀국하라는 전보를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무장투쟁조직을 같이 결성하기로 한, 약속을 실행할 수 없게 되었다는 이야기이었다. 자기는 이 일을 두고 여러 날을 고민을 했는데, 아무래도 자신은 국내로 들어가 싸우기로 했다는 결론이었다.  그 대신에 해외에서 독립무장투쟁기지를 만들기 위해 농토를 구입하려던, 일부 돈과 함께 그동안 은밀히 구해둔 신식-권총 5자루를 넘겨주었다. 그리고 그동안 길림에서 일제와 무장투쟁을 하기 위해 의군부[義軍府]가 조직되었는데, 주석에 여준[呂準], 군무부장에 김좌진[金佐鎭], 중앙위원에 손일민[孫逸民]과 황상규[黃尙奎(白民)]지사들이 있으니, 거기에 찾아가 협력을 부탁하라고 일러 주었다.


손일민과 김좌진은 그전에 [안동현]에서 만나, 서로 독립무장투쟁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는 애국지사들로서,  만나면 서로 기뻐할 사이었다. 약산은 뛸 듯이 기뻤다.

 

멸칠 뒤 약수와 이여성은 국내로 들어갔다. 이때가 늦가을이었다. 약산은 벼르고 있던 의군부[義軍府]를 찾아갔다. 의군부-사람들은 약산이 뜻하지 않게 방문하자, 모두 크게 기뻐했다. 또한 약산에게 은근히 같이 일해주기를 바랬다. 그러나 [약산]은 무장병력으로 일제군대와 싸워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던 때이므로, 항일무장전투를 한다는 [의군부]-조직에 들어가, 같이 일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 약산은 물었다. 한 100-여 자루쯤, 신식총을 구할 수 있느냐고? 의군부-사람들은 한결 같이 대답했다. 보통수단으로는 도저히 총을 구입하기 어렸다고 말했다. 뿐만이 아니라 신식-총은 엄청나게 비싼데, 그것은 마적을 통하면 구입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었다. 약산은 실망했다. 도적놈들인 마적들과 무기를 흥정한다는 건,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그들은 돈뭉치만 보면, 마음이 돌변하여 돈을 빼앗고, 사람까지 학살하는 무리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약산은 기대한 만큼, 큰 실망도 컸다, 약산은 맥이 풀려, 건성건성 작별인사를 나둔 뒤, 의군부를 나왔다.


약산은 대-일본제국군대[大 日本帝國軍隊]와 맞붙어 싸우는 길은, 오직 저격암살과 폭탄물로 일순간에 파괴하는 공작이 최고에 성과를 낸다는, 그러한 확신에 차있었다,

 

이는, 군대조직유지비와 견줄 수 없도록 경비가 덜 들며, 나아가서 겨울철인 엄동설한인 때에도, 추운 한디에서 잠을 잘 필요도 없으며, 또한 평상시에서도 암살단원들이 활동하는 정보가 노출될 그런 위험도 아주 적은 대신에, 일군[日軍]들 주둔지, 경찰서-파출소, 관청-공공건물들을, 일시에 폭파할 수 있는 가능성에 있어, 소규모 인원으로도 충분하다는, 그러한 확신에 찬 항일전술이었다.

 

말하자면, 수 백여 명에 달하는 병사들을, 날마다 먹이고~입히고~잠을 재우려면, 그 유지비가 엄청 나며, 또한 늦은 봄철부터 늦은 가을까지는, 그래도 숲속에서 노출되지 않고 견딜 수 있겠으나, 눈보라치는 겨울철엔, 그 많은 병사들을 이끌고 이동하는 도중에서, 단 한번만 일본군에게 발각되면, 사방팔방으로 포위되고, 또한 발달된 일본군들 신식무기를 당해내기 대단히 어렵다. 자칫 잘못 하면, 사방팔방으로 포위되어, 모조리 떼죽음을 당하는 위험성이 늘 따르기 마련이다. 또한 그러한 사례가 많다, 그래서 정식무장전투로는 일본군을 제압시킬 수 없음을, 그동안 뼈저리도록 깨달은 약산이었다.


- 약산은 파리-거사를 실패한 뒤로 반년이나 넘도록 시간을 허비했기 때문에,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한 두 사람으로는 어렵다고 체험했다. 그래서 항일비밀결사대(暗殺 團:테러단)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좀더 사람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동안 사귀어왔던, 절친한 동지들은 하나둘씩 상해임시정부요원으로 나가고, 또는 국내로 들어가고, 또는 실력을 배양해야 한다는 쪽에 학교걸립요직으로 나갔으며, 더구나 무력투쟁을 원하던 쓸 만한 일부사람들도 [의군부] 같은데서 마지막으로 모두 훑어 가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다가 신식총마저 구입하기 아주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저러나 약산은 사람보다는 먼저 일본-놈들을 일시에 대대적으로 죽일 수 있는 무기를 구입해 놓는 게 선차적이라고 맘을 굳혔다.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무기가 없으면 [손가락으로 싸울 수 없어, 막대기나 다름없다.]-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때에 [약산]-머릿속은 온통 총기구입∼폭탄제조기술로 꽉 차있었다.


그동안 몇 달이 흘렀다. 그사이 몇 동지들을 규합했다. 그 가운데 한사람은 쭝궈(중국)사람이었다. 뿐만이 아니라! 이리저리 애를 써서 주소문한 끝에, 폭탄을 제조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 사람은 상해[上海]에서 쭝궈-군[中國 軍]-폭탄제조기술교관으로 근무하는 사람인데, 이름은 주황[周 況(가명)]이라고 했다. 그는 전라도[全羅道] 출신으로 [을미조약]-때에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 쭝궈[中國]으로 넘어 온 조선혁명가이자 나이는 40-살쯤이라고 했다. 정확한 정보로 봐 믿음직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길림[吉 林]에서 상해[上海]까지는, 너무나도 먼 거리였다.


약산은 몇 동지들과 함께, 길림[吉林]을 떠나 서간도[西間島]로 갔다. 서간도엔 조선교포들이 조직한 부민회[扶民會]가 있는데, 부민회에서 신흥학교[新興學校]을 건립하여 조선청년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 학교는 무관학교[武官學校]이었다.

 

학교장은 이천민[李天民]으로서, 충무공[忠武公]인 이순신[李舜臣]에 증손이었다. 약산은 이 학교에서 젊은 청년동지들을 만났다. 여기에서 김동삼[金東三]이 상해까지 가서 주황[周黃]을 서간도-신흥학교로 초빙해 왔다. [김동삼]은 과연 지사[志士] 다운 기질이 있는 사람이었다. 약산은 신흥학교에서 여러 동지들과 함께 폭탄제조법을 주황으로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의열단[義烈團]을 쭝궈-길림성[中國吉林省]에서 조직.

서기 1919.11.9날인, 한 밤중이었다. 김원봉(金元鳳/약산)∼김상윤(金相潤/金相玉)∼김칠성(金鐵城/金一)∼강세우[姜世宇]∼곽경[郭敬]∼김동삼[金東三]∼반(潘/쭝궈)∼배동선[裵動宣]∼서상락[徐相洛]∼신철휴[申喆休]∼윤세주[尹世胄]∼이성우[李成宇]∼이종암[李種岩]∼한봉근[韓鳳根]∼한봉인[韓鳳仁]들인 15지사들이 모여 결성했다.

그리고,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이날 자리를 같이하지 못한, 신채호(申菜浩/단제)∼김약수(金若水/김산)∼이여성[李汝星]선생들과 모두 18-사람이 비밀결사대를 조직하기로 오랫동안 벼려왔는데, 이날에 모인 사람은 모두 15사람이었다. 15사람들이 논의하여 의열단(義烈 團)이름으로 항일독립-비밀결사대를 조직했다. 그리고 암살결사대-조직책임자인 단장엔 김원봉(약수)선생을 추대했고, 의열단규약과 항일비밀결사대-선언문을 작성하여, 낭독했다.

[3].의열단-비밀조직-공약(義烈 團 秘密組織公約)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ko/a/a6/%EA%B9%80%EC%95%BD%EC%82%B0.jpg

(1). 천하에서  정의[定議]와 사(事)를 맹렬(猛烈)히 실행함.

-(첫째: 누리에서 옳은 일을 거세게 이룩해 나간다.)


(2). 조선독립[朝鮮獨立]과 세계평등을 위해 신명[身命]을 희생[犧牲]함,

-(둘째:우리나라를 되찾기와 누리에서 두루삶을 위해 몸과 목숨을 바친다.)


(3). 충의의 기백과 희생정신이 확고한 자라야 단원이 된다.

-(나라를 사랑하는 맘가짐과 싸우는 정신이 투철해야 만이 단원으로 된다.)


(4). 단의[團義]를 우선하고 단의를 급히할 것.

-(조직에서 우애를 먼저하고, 조직우애를 빨리 이루도록 한다.)


(5). 의백[義佰]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한다.

-(의로운 일에 뛰어난 한사람을 뽑아 단체를 이끌어 나간다.)


(6). 하시[何時],하지[何地]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한다.

-(어느 때, 어디에 있거나 1달에 1번씩 꼭 정보를 알린다.)


(7). 하시 하지에서나 초회[招會]에 필응[必應]할 것.

-(어느 때, 어디에 있거나, 회의소집에 반드시 참가해야 한다.)


(8),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團義]에 진[盡]할 것.

-(잡혀죽지 않은 이상, 조직에 의무를 다한다.)


(9). 일[一]이 구[九]를 위하여, 구가 일을 위하여 헌신할 것.

-(한사람은 전체를 위해 싸우고, 전체는 한사람을 구하기 총력을 다 한다.)


(10)-단의[團義]를 배반한 자는 학살한다.

-(조직을 위반하고 떠난 자는 암살한다.)


위와 같이 [의열단]-비밀조직공약으로는 10-조목을 결정했다. 공약-5조목에 따라, [약산]을 의열단, 최고 책임자로 뽑았다. 이때에 [약산]에 나이는 22-살이었다.

 

        -(아래 사진)-

[미-소,공동위원회-환영, 시민대회에서,

연설하고 있는,  김원봉-선생]

* 이와 같이, 김원봉[金元鳳(若山]은 조선왕국을 차지하려는 전쟁 곧 1905해에 일-노 전쟁[日露戰爭]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일본제국에 서울인 동경[東京]에서 일본외무성관료인 [가스라 무라]와 미국외무차관인 [태프트] 사이에 [가스라-태프트 밀약협정(1905.7.29)으로 조선침략음모[陰謀]를 성사시켰다.


이처럼 일본과 미국이 서로 짜고, 비밀음모조약을 맺어...<1>-일제는 조선을 무력적 압력으로 침략-점령하여, 총독식민정치로 다스렸고, <2>-미국은 필리핀을 점유한 뒤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맨 먼저 [영어교육기관]부터 설립시켜 [필리핀인]들을 영어정신-문화적으로 완전히 제압함으로서 [필리핀]-정통적인 고유언어는 점차 그리고 실재로 상실되고 말았다.

 

[가스라-태프트 밀약협정(1905.7.29)인 핵심내용은, [...조선을 일본제국이 차지하는데 있어, 미합중국제국은 간섭하지 않는다, 필리핀을 미합중국제국이 점유하는데 있어, 일본제국은 간섭하지 않는다...]-라는, 비밀모의협정을 일-미[日-美]간에, 음성적으로 성립시킨, 그런 음모협잡-조약이었다.


- 이 때로부터 [을미보호조약(乙未保護條約)1905.11.17]이, 강압적으로 성립시킨지 3해 만에, 미국거주교포인 전명운[田明雲]과 장인환[張仁煥]지사기가 샌프란시코에서 친일파-미국외교관, 스티븐슨(1908.3.23)을, 권총으로 사살해버렸다.


이러한 뒤로, 또한 안중근(安重根/1909.10.26(암살)~1910.3.26/여순감옥-사형)선생이 하르빈-역전에서. 이또-히로부미(伊藤博文)을 일본제국과 전투하는 과정으로서, 사살해버렸다. 그해 이듬에 또한 이재명(李在明)-열사가 친일파-거두인 이완용(李完用)을 종현(種現)에서 깔로 찌른, 의거(1910.10)로부터, 12해가 지난 뒤에야, 김원봉(약산)이 태여 난 셈이었다.


- 약산은 학창시절부터 이러한 사건들을 보고 듣고, 배우며 자랐고 또한 자신이 스스로 파리-열강회의에 암살자로 나섰으나. 권총도난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나아가서는 국내에 3.1-운동이 무장투쟁으로 승화하지 못했음을, 가슴을 치며 아파했으며, 과거 [안중근]-의사가 투쟁했던, 빼어난 비밀거사를 계승되지 못하고, 단발로 끝나버린 아픔을 뼈저리도록 깨달아 온데서부터, 암살단(테러단)조직에 대해, 강렬한 의지를 굳혀 온 항일혁명가이었다. 의열단(비밀결사대)은  그동안 항일혈전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당시에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단체는, 비밀결사대 바로 의열단이었다.

 

[4]. 의열단-비밀결사대-임무(義烈 團 秘密 決死隊 任務): 

1919.11.9날에 만주-길림성-파호문외(巴虎門外)에서 결성을 본 조선의열단(朝鮮義烈團)은 3·1운동이 국내외에서 벌어진, 독립운동들 가운데서, 일제가 가장 공포와 전율을 느끼게 했던 단체이다. 김원봉(金元鳳)~이종암(李鍾岩)~이성우(李成宇)~윤세주(尹世胄)~강세우(姜世宇)~곽경(郭儆)~김상윤(金相潤))~배동선(裵東宣)~권준(權畯)~서상락(徐相洛)~신철휴(申喆休~한봉근(韓鳳根)~한봉인(韓鳳仁)들인  13애국지사에 의하여, 결성된 의열단은, 그 단장에 김원봉이 추대되어 구축왜노(驅逐倭奴) 광복조국(光復祖國) 타파계급(打破階級) 평균지권(平均地權)을 최고 이념으로 삼았다. 그리고 암살대상자들과 폭파건물들에 대해,  7가지를 선정해놨다.

 

▶ 조선총독부 이하 고관들,

▶ 군부 수뇌들,

▶ 대만 총독(군벌 장개석),

▶ 매국적[賣國賊],

▶ 친일파 거두들,

▶ 적의 밀정(첩자),

▶ 반민족적 귀족 및 대지주들,

 

<1921.9.12/ 조선식민통치-일제총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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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파-공격건물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선정해 놨다.

▶ 조선총독부,

▶ 동양척식회사,

▶ 매일신보사,

▶ 각 경찰서,

▶ 기타 왜적에 주요 기관,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5]. 의열단∼투쟁강령공약(鬪爭綱領公約):

투쟁강령인 암살∼파괴∼대상물∼공약은 모두 [약산]이 직접 초안했음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조선민족-생존에 적인 일본 제국주의에 통치를 근본적으로 타도하고, 조선민족에 자유독립을 완성할 것-,

 

(2). 봉건제도 및 일체 반혁명세력을 제거하고 진정한 민주국을 건립함,

(3). 소수-인이 다수-인을 박삭[剝削]하는 경제제도를 소멸시키고, 조선인 각개에 생활상-평등적 경제조직을 건립할 것-,

(4). 세계에 반-제국주의와 민족과 연합하여, 일체 침략주의를 타도함.

(5). 민중을 무장시킬 것,

(6). 인민은 언론∼출판∼집회∼결사∼거주에 절대 자유권을 확보할 것,

(7). 인민은 무제한적인 선거 및 피선거권이 있을 것-,

(8). 일개 군[郡]을 단위로 하여, 지방자치제를 실시 할 것-,

(9). 여성에 권리를 정치∼경제∼사회∼교육에서 남성과 동등케 함,

(10). 의무교육∼직업교육을 국가에 경비로 실시 할 것,

(11). 조선-내 일본에 각종단체(동척∼흥업∼조선은행[朝鮮銀行] 및 개인(*일본인)이 소유한 일체 재산을 몰수 할 것임,

 

(12). 매국적[賣國賊]인 정탐(*일제 앞잡이)을 반도[叛徒(*반란군)]들에 재도 모두 몰수 할것,

 

(13). 농민운동-자유를 보장하고 빈고[貧苦] 농민에게 토지∼가옥∼(농)기구들을 공급 할 것임,

 

(14). 공인[工人(*노동자)]운동-자유를 보장하고, 노동평민에게 가옥을 공급할 것,

(15). 양로∼육영∼주제(*구호)들에 공공기관을 건설함,,

(16). 대규모에 생산기관 및 독점성질을 가진 기업(철도∼광산∼선박∼전기∼수리(水利)∼은행)들은 국가가 경영한다.

(17). 소 득세는 누증율[累增率(*누진세)]로 징수할 것임,

(18). 일체 가연잡세[苛 捐 雜稅]를 폐제[廢除]할 것임,

(19). 해외거류-동포들에 생명∼재산을 안전하게 보장하고, 귀국동포에게 생활상 안전지위를 부여할 것임,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조선혁명선언에서 마지막 제5장-문장]=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암살-파괴-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 지니라!

 

 


 

 

=[맺음말]=

[약산]선생이 초안한, 초안공약으로 채택된 강령으로 보면 [약산]에 사상이념은 다음과 같이 분류하여 파악해 보았습니다.


(1)-조목에서 보면, 항일독립논자,

▶(2-3)-조목에서, 혁신주의자,

▶(4)-조목에서, (약속국 연대)국제주의자,

▶(5)-조목에서, 무장투쟁혁명가,

▶(6-10)-조목에선, 사회혁신주의자,

▶(11-12-18)-조목에서, 민족주의자,

▶(13-14-15-16-17)조목은 사회통합주의자,

지난, 아메리카-[부시]정부가 아프칸에 [오사마 빈 라덴]를 보고 선, [테러두목 악마]-라고 말해왔다. 그렇다면 오사마 빈 라덴은...괜히  생명을 불사하면서까지  미국과 싸울까? 그러니까  우리나라를 침략한 일본제국과 혈전으로 싸우기 위해, 맨 처음으로 동방[東方]에서 암살단(테러단)을 조직하여 저항하던 의열단에 대해, 그때에도 일본제국은  [암살도당-소굴]로, 매도했었다.


그러므로 군사대국들이 과거로부터 국제침략전쟁에서, 저항투쟁하는 투사들을 모두 다  악당~암살(테러)~악마~깡패들로, 국제여론을 선동해왔듯이, 그런 여론조작으로, 매도해 오고 있다,

 

..하지만, 일제식민지인 조선에서, 김원봉(金元鳳/若山)선생은 약소국을 침략하고 있던, 일본제국과 혈투(터러)로 맞서 싸웠다. 일제식민지였던 그 때에 우리입장으로 되돌가 보면, 김원봉(金元鳳/若山)선생은 특출나게  빼어난  비밀결사대단장으로써, 오늘날에 [오사마  빈 라덴]에 비해, 그 아버지벌이 되신다.

나가서, 독립결사대-애족지사(愛族烈士)로서, 의열단을 조직하시고 그 단장으로써 일본제국과 혈투로  싸우신  [김원봉]선생은  또한 큐바에 [체 게 바]혁명가 못지않은, 대-혁명가이시었다. 

http://image.ohmynews.com/down/images/1/sicho_236154_8%5B351049%5D.jpg

사용자 삽입 이미지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ko/a/a6/%EA%B9%80%EC%95%BD%EC%82%B0.jpg

(1960년도에 체 게 바라는 평양을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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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글쓴이는 가끔씩 친일파청산을 생각하면서, 의열단-단장이시었던, 약산-[김원봉]선생이 떠오르면, 언제나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글쓴이 풀이말]

새  나라는 새로운 젊은 이들이 , 새롭게 건설할 것이요!,

새로운 젊은 이들은 확고한 새 사상으로 아름답게 결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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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누구보다도 일본-오사카출생자인  쓰키야마 아키히로(月山明博/李明博)가 패권을 장한 그때부터, [한일신시대를 열다.]-라며, 일본왕에게, 구십도애 가깝도록 절을 올리며 황송히 배알했고, 또한 후쿠다-총리가 독도를 중학교-교과에다가 일본-고유영토로 명시하겠다고 물으니까, [ 지금은 곤란하다, 조금만 가디려 다라!]-라며, 그런 유보적인 헛소리를 실없이 함으로써, 일제와 혈투로 싸우신 의열단장, [김원봉]선생에 자존심이, 지하에서 심히 상처를  입는다고 보며. 이는 또한 우리나라를 침략한 일제에 대한, 한국인들, 투혼정신인 자존심을 짖밟은, 그런 상처로 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만...

 

배달겨레 참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