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인물

명성황후 [明成皇后 ]

H극동 2010. 12. 17. 01:16

 









본관은 여흥(驪興), 성은 민(閔)씨이며, 1851년(철종 2) 경기도 여주(驪州)에서 영의정에 추증된 치록(致祿)의 딸로 태어났다. 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살았으나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주변에 알려졌다. 16세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하 대원군)의 부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의 추천으로 고종 비(妃/이하 비)에 간택되었다. 그러나 고종은 궁인 이씨로부터 완화군(完和君)을 얻고 비를 돌보지 않았으나 비는 예의범절이 밝아 칭송을 받았다. 완화군이 태어나자 대원군은 이를 기뻐하였고 비는 이에 분개하여 불만을 가졌고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후에 원자가 태어났으나 5일 만에 요절하자 그 원인을 가지고 대원군과 더욱 대립하였다. 비는 대원군의 반대파인 민승호, 대원군의 형 이최응(李最應), 그 아들 재면(載冕), 조대비의 조카 조성하, 대원군의 반대 세력인 김병국, 조두순, 이유원 등을 규합하여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였다.

마침 1873년 일본에서 대두된 정한론(征韓論)으로 내외정세가 불안해지고, 경복궁(景福宮) 중건으로 민생고가 가중되는 등의 이유로 대원군에 대한 민심이 나빠지자 이를 이용하여 유림의 거두 최익현(崔益鉉)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하고, 대원군의 실정과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게 하여 결국 10년간의 권좌에서 물러나게 하였다(1873). 고종에게 친정(親政)을 선포하게 함과 동시에 비 중심의 세력으로 정권을 구축한 뒤, 개방정책을 펴서 일본과 수교하였다(1876).

대원군과의 대립이 심화된 가운데,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발발하여 민씨 세력이 위협을 당하자 비는 궁궐을 탈출, 화개동(花開洞) 윤태준(尹泰駿)의 집을 거쳐 충주(忠州)·장호원(長湖院)으로 옮겨 다니며 피신하였다. 국내가 혼란해지자 고종은 대원군의 힘을 빌렸고, 비가 오랫동안 사라지고 나타나지 않자 대원군이 중전의 국상(國喪)을 선포하려 하였다. 이때 윤태준을 고종에게 밀파하여 자신의 건재를 알리고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하게 하였다. 청나라 군대의 출동으로 군란이 진압되고 대원군은 청으로 압송되는 수모를 당했고, 민씨 중심의 정권이 다시 수립되었다.

1884년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 등 급진개화파가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키자, 심상훈(沈相薰) 등을 통하여 청군이 개입하도록 함으로써 3일 만에 개화당(開化黨) 정권을 무너뜨렸다. 점차 정권을 좌우하고, 대원군에의 복수심을 키우고 궁궐에서 굿을 하거나 치성 명분으로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국고를 낭비하기도 하였다.

일본 세력의 침투가 점차 강화되면서 김홍집(金弘集) 등 친일(親日) 내각이 득세하고, 1894년 7월 일본 세력을 등에 업은 대원군이 재등장하면서 갑오개혁이 시작되자, 이번에는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 세력을 추방하려고 하였다. 이에 일본 정부의 사주를 받은 주한 일본공사(公使)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일본 낭인들을 궁중에 잠입시켜 명성황후를 살해하였다. 봉록을 받지 못하고 유랑하는 무사(武士) 계층을 가리키던 낭인(浪人, 로닌)은 상당수가 조선과 만주에 진출하여 일본의 대외침략주의에 앞장서고 있었다. 일본 낭인들은 그녀의 시신을 궁궐 밖으로 옮겨 소각하였다(을미사변 乙未事變).

그 뒤 폐위되어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다가, 같은 해 10월 복호(復號)되었고, 1897년(광무 1) 명성(明成)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 해 11월 국장(國葬)으로 청량리(淸凉里) 밖 홍릉(洪陵)에 안장되었다. 고종의 황제 즉위를 계기로 명성황후(明成皇后)라 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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