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인물

왜 한국-코리아인가?

H극동 2010. 11. 3. 19:28

 
● 왜 한국-코리아인가?

위 지도에서 보듯이 세계 최강 4대강국과 얽혀있는 나라가 우리말고 또 있는가? 4대 강국의 한복판에 자리하면서 그렇게 모진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리지 않고 버텨낸 이 저력은 무엇인가! 대륙과 대양을 연결하는 고리를 가진 반도 국가가 있는가? (이탈리아는 반도 국가이지만, 거대 대양으로 뻗어 있진 않다.) 과거, 대륙에 우리만큼 거대한 연고권을 가진 국가가 있는가? 다종교를 수용하는 국가면서도 우리처럼 종교적 균형잡힌 구도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가 있는지 나는 모른다.

미래에 세계를 선도할 사명을 가졌다고 말하는 민족은 히브리족(슈메르인 아브라함을 선조로 하는 유태인)과 한민족이 유일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시원은 우리 한민족과 한뿌리(한국=>슈메르=>이스라엘)를 공유한다.그러나, 히브리족은 주변 외세의 침략을 받고 식민지를 겼는 과정에서 혼혈화로 순수성을 잃었고, 히브리족 다수를 구성하는 아슈케나지 유태인들 또한 이미 혈통적으로 진정한 히브리족이 아니다.

물질문명을 지배하고 있는 히브리민족과 정신문명을 지배할 한민족의 영적 전쟁에서 과연 누구 승리할 것인가? 그것은 정신문명이 공허한 작금의 세계상황에서 물질문명을 선도할 정신문명민족이 인류의 중심민족이 될 수 밖에 없다. 한민족에게는 일부 우리가 남이가 유전인자들을 제외하고 유전학적으로도 어질고 순박하고 의롭고 살리기를 좋아하고 주기를 좋아하고 섬기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세계인심을 사로 잡고 인류평화를 주도할 우리 한민족과 한반도의 미래는 매우 밝다 할 것이다.



그럼 인류사적으로 민족사적으로 이러한 위대한 역사를 실현한 한국-코리아족의 발자취를 역사추적해 보기로 한다. 유라시아-아메리카의 모든 한민족은 모두 환인.환웅.단군왕검의 후예들이지만, 한민족 중에서도 머리역할을 했던 종족이 바로 코리족이다. 그래서 대한민국.한국.코리아라는 국호는 우리 민족이 앞으로 인류의 중심으로 부활한다는 미래적인 희망을 담고 있는 국호라 할 것이다.



한반도에 갇혀 살 것인가? 유라시아로 나갈 것인가?

유라시아 대제국을 건설하여 동서를 하나로 연결하고 현인류문명이 진보하는데 크게 공헌한 징기즈칸의 몽골은 [환단고기]에 기록된 몽고리(마고리=마쿠리=말갈=메르키트)에서 기원한다.

단군조선당시 유목생활을 하던 몽고리(몽골)과 어로수렵생활을 했던 고리(고구려)는 모두 단군조선(진조선)의 제후국들이였다. 수렵어로유목생활을 했던 고리족은 만주와 한반도를 중심지로 삼고 유라시아를 경영했던 한국.신시배달국.단군조선.부여.고구려.몽골제국를 통치한 천손족(황족)이다. 고리족의 위대성은 가오리,고구려.고려,그리스의 아고라(아!코리아),아메리카(아!몽고리=메리키트=말갈),코란.커란(코리안),고울(을),구리,고리,구이 등으로 남아 있다.

고구려.백제, 그리고 경주지역에 정착한 진조선.부여유민의 나라 사로국은 어로수렵생활을 했던 코리족 부여의 나라들이며, 4세기 이후 지나대륙에서 한족화된 흉노후예 김알지세력과 연합하여 경주지역의 사로국을 무너뜨리고 신라를 개국한 주체는 바로 성을 선비족 모용씨에서 김씨로 바꾼 선비족이다.따라서 신라는 혈통적으로 당나라와 동일하며 유목생활을 했던 흉노.선비족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경주지역의 북방유목민들의 무덤(적석목곽분)이 이를 증명한다. 그래야 당나라와 신라의 군사동맹이 이해되고, 부여족인 고구려와 백제의 군사동맹이 이해된다.

유라시아 초원을 지배하기도 했던 흉노.선비족은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 국통맥으로 따지자면 선비족의 나라 신라와 당나라의 군사동맹을 통한 단군조선의 황족 부여족의 나라 고구려.백제를 공격하여 멸족시킨 행위는 반란행위이자 자식이 부모를 살해한 폐륜행위라 할 수 있다. 황족의 나라는 그 만큼 전통이 있기 때문에 당당한 자부심도 강하고 위엄이 있고 질서체계가 명확하고 통합적 리더쉽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제후국들은 하위나라들이기 때문에 천황국의 명령을 따라야 하고 예를 무시하고 호전성만 내세우는 종족인 경우에는 반란적 기질이 강하다.


▲ 수렵유목문화의 상징 신라왕관                    ▲ 유목문화의 상징 경주지역 적석목곽분

[환단고기]에 흉노의 시조는 단군조선당시 열양(황하북쪽지역)의 욕살(지방관) 색정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색정이 폭정을 자행했는지 반란을 일으켰는지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단군이 약수(고비사막지역)으로 유배보내서 갇혀있게 한 후에 색정이 뉘우치자 약수지역의 다스리게 하는 관리로 봉하니 흉노의 시조가 되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그러고 보면 색정을 시조로 삼는 흉노후예들은 유전적으로 보아도 어진 정치하고는 거리가 먼 족속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대시대에 최첨단기술에 해당하는 철제조기술을 일찍이 보유한 코리(고리)족은 현인류문명의 요람으로 부각되고 있는 요서지역(유라시아 초원과 만주-한반도를 연결하는 지역)을 터전으로 삼아 신시배달국과 단군조선과 부여(고구려.백제=일본)의 지배족으로 군림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코리족이 유라시아 초원세력을 지배하고 서방.아메리카로 진출하여 청동기.철제무기를 개발하고 피라미드 문명을 건설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서방에서 문명이 이동해 왔다는 역사논리는 거짓말이다. 요서지역의 요하문명자체가 서방보다 훨씬 연대가 빠른 9천년전의 문명이기 때문이다.그리고 이 요하문명은 바다가 되기 전 서해지역의 마고문명이다.다시 서해가 육지가 되면 대서양속에 감추어진 아틸란티스문명처럼 마고문명의 실체가 드러나리라 본다.

지나지역의 우두머리 황제헌원이 배달국에 도전하여 전쟁을 일으키자 치우천황은 배달국 신시(백악산 아사달-장춘)에서 북경지역인 청구로 수도를 옮겨 황제헌원과의 전쟁을 10년이 넘게 71회에 걸쳐 한다. 그리고 탁록에서 죽사발을 내고 황제헌원을 사로 잡아 신하로 삼는다. 이후 번개와 폭풍의 신으로 신격화된 치우천황은 동.서방에서 전쟁신으로 군림했다. 그리스 제우스(치우스)가 바로 치우이며, 중동지역에서 최초로 철을 제조한 히타이트족의 민족신이 바로 치우이기도 하다.그리고 이집트 피라미드를 건설한 왕조가 치우왕조다. 치우족의 서방진출과 관련된다.그리고 지나에서는 진시황과 한나라 유방이 전쟁신으로 삼는 배경이다.

이 치우가 바로 청구지역(북경부근 난하강 지역에 살던 고리족)에 사는 고리족의 천자라고 지나국에 기록되어 있다. 고리족은 수렵생활을 했던 이유로 철제조기술이 일찍부터 뛰어 났다. 단군조선 후기 구물천황 때 국호를 대부여로 고친다. 그리고 해모수가 개국한 나라도 부여(북부여)다. 해상제국 백제의 황족씨도 부여씨다. 서울에서 충청도지역으로 수도이전을 할 때 웅진(곰나루)다음 지역을 백제 성왕 때 부여라고 정했다. (단군1대 임검의 4번째 막내 아드님이 부여였다.)


▲ 불을 상징하는 백제왕관

부여는 불이야에서 어원한다. 철제조에 필요한 불을 상징하는 나라명인 것이다. 바이칼호수지역 알흔섬지역에 사는 브리야트족이 바로 불이야족이다.(정신적으론 광명을 지향) 이 브리야트족은 본래 흑룡강지역에서 살았던 부여족인데, 광개토태왕이 부여를 정벌하면서 몽골지역으로 이주시킨 부족이다. 흑룡강지역의 코리족을 몽골지역으로 이주시킨 셈이다. 징기즈칸의 출생지를 몽골에서는 이 알흔섬지역으로 본다. 징기스칸의 부족인 몽골은 앞서도 이야기하였지만 북부여 즉 부리얏트족 후손이다. 몽골비사에 따르면 시조 볼테치노는 탱그리(단군-하느님)의 천명을 받아 태어났으며 10대를 지나 알랑고아란 모계로 이어지고 알랑고아에서 다시 12대가 지나 징기스칸이 태어났다. 1대를 30년이라 보면 약 700년 전이 바로 볼테치노 시대이다. 징기스칸이 1155년에 태어났으므로 징기스칸의 시조 볼테치노가 4세기 후반의 인물이고 이때가 바로 고구려의 가장 위대한 군주인 광개토대왕의 통치시기이다.

따라서 징기즈칸 조상인 코리족이 바로 고구려의 이주정책에 따라서 바이칼 호수지역으로 이주해 왔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것은 동부여에서 망명해 온 고추모가 당시 한나라 침략을 물리치고 민족영웅이 되는 바람에 해모수왕조를 접수한 동명성왕 고두막이 지배하고 있던 북부여지역으로 이주해 와서 아들이 없었던 고무서단군의 둘째 딸 소서노와 결혼하여 단군에 오르자 이에 고추모 왕위계승에 반대한 토착세력이 바로 바이칼 호수지역으로 이주한 코리족 부여(브리야트족)이며, 고구려와 부여의 정통성을 놓고 싸운 만주와 한반도지역에서 패권을 다툰 구태백제세력이라 할 수 있다. 요서지역에서 한반도 평안도(대방군)지역으로 100가구를 데리고 이주하여 나라를 세운 바람에 백제가 된 구태백제는 이후 한강지역에 십제를 개국한 고주몽 아들 온조세력을 통합하고 서남해 해상세력(마한해상세력)을 흡수하여 서남해 바다를 장악하여 해상제국을 건설한 것이다.

단군한검은 단군조선을 개국한 후에 이 치우족에게 철을 제조하는 일을 맡겼다. 고리족은 본래 북경지역에서 살다가 흑룡강지역으로 이주한 것 같다.고구려가 선조들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북경지역을 장악한 배경이기도 하다.

고리(코리)족 출신 고등은 단군조선 21대 소태단군 때 우현왕이였고, 백악산 아사달(장춘)에서 일어나 22대 단군천황에 올라 국가기강을 강화하고 지나대륙 동남부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한 색불루는 고등의 손자였고, 부여(북부여)를 개국한 해모수와 계승한 고두막, 코리(고구려)를 개국한 고추모 모두 고리족 출신이다. 그리고 몽골지역으로 이주하여 유라시아 대륙을 경영한 징기즈칸 역시 고리족의 후예다. 우리 민족또한 위대한 고리(고구려)족의 후예로 역사의 주역이 되야 한다.

몽골족과 몽골족으로 편입하여 대제국을 건설한 코리족(고리.구려)

[몽골비사]에서 시왕모는 알랑고아다. 남편을 여의고 자식들을 잘 키워낸 어머니이기 때문이다.그래서 몽골에서는 유득히 어머니에 관한 노래가 많다.

알랑고아의 아버지는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코릴라르타이-메르겐이였다.알랑고아의 아버지는 코리(고리)족-투메트 부족의 귀족인 코릴라르타이-메르겐, 어머니는 바르코진-고아였다. 코릴라르타이-메르겐 가족이 살던 곳은 사냥감이 많은 축복받은 땅. 그러던 어느날 이 곳에서 사냥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코릴라르타이-메르겐은 사냥을 못하게 만든 코리-투메트 부족과 사이가 아주 나빠졌다. 결국 그는 그들과 결별하고는 코리라르라는 새로운 씨족을 만들었다. 코리라르타이-메르겐이란 코리라르의 활 잘 쏘는 사람이란 뜻이다. 메르겐이란 말은 보통 집단의 우두머리에게 붙이는 호칭이었다.

이제 그들은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나야 한다. 이미 코리-투메트 부족과는 결별했지 않은가. 이제 그들은 남이다. 보르칸칼돈이란 산에는 큰 사냥감이 아주 많다.

알랑-고아는 도본-메르겐과 결혼해서 두 아들을 얻었다. 그렇게 지내다가 도본-메르겐은 세상을 떠났다. 세월이 흘렀고 알랑-고아는 아들 셋을 더 낳았다. 집에는 알랑-고아와 아들 오형제 밖에 없다. 다섯 형제를 제외하고 남자라고는 오직 도본-메르겐이 주워 온 노예 한 명이 있을 뿐이였다. 몽골족을 통합하고 유라시아를 경영한 징기즈칸의 선조는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고, 지금까지도 몽골인들이 아버지보다도 더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존경하고 모시는 역사적 배경이라 하겠다.


▲ 몽골 북서부 자우황아이막에 있는 만년설산 오트깅 텡게르를 자수로 표현했다

몽고의 기원은 작은 몽고리 마을에서 기원한다.[환단고기]에 보면 몽고리는 단군조선시대부터 존재했으며, 4대 오사구 단군의 동생 오사달이 몽고리 칸으로 임명됐다.

단군조선시대부터 존재하던 몽골족(4대 오사구 단군의 동생 오사달이 몽고리칸으로 몽골족의 시조)은 본래 유목생활을 하던 북방 한국인들이고, 고리족은 어업과 수렵을 주로 하던 북방 한국인들인데, 코리족은 이동이나 어업에 동물의 기름으로 방수처리를 한 가죽 보트나 북미 인디언들이 썼던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카누 비슷한 것이 이용된 듯하다.

따라서 베링해협을 건너 아메리카로 간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강을 따라서 살았던 코리족이라고 할 수 있다. 고리(코리)족의 일부(보르지긴씨족)가 몽골족속으로 들어가 훗날 몽골족을 통합하고 유라시아 대륙을 경영하게 되니 코리족 출신의 징기즈칸인 것이다.

지나국 기록은 고리국 또는 북부여를 대체로 서주시기 (BC12 - BC 8세기)경 이미 고리족의 본거지인 북경지역에서 흑룡강 지역에 이주해 와서 백금보 문명이라는 한 미니문명을 만든 부족으로 보기도 한다.

하여튼 부여와 고구려가 개국하기 전 고리족이 씨족, 또는 부족 국가 형태로서 흑룡강 중류와 상류에 있었다는 것은 역사학자들이 대체로 인정하는 분위기이다. 즉, 본래 목축을 전문으로 했던 몽고리은 더 목축하기 좋은 몽골초원 쪽으로 이미 흩어져 들어갔을 것이다. 강가에서 살던 코리족은 몽골족과 같이 살다가 흑룡강 동쪽으로 더 이동해 들어 간 것으로 보인다.

그 때 지나국문헌에서 청동기문명의 주역인 맥족 또는 코리족이라고 부르던 종족은 수렵과 채집 그리고 내륙 민족 답지 않게 어업으로 먹고 살았었다. ( 어업은 나중에 흑룡강 연안에 살던 흑수 말갈족이 이어 받는다)


▲ 코리족의 이동경로(노란색)
 
왜 코리족은 산동.양자강지역에서 북상했나? 그 배경은 [환단고기] 23세 단군 아홀 때의 기록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갑신 원년(BC 1237년), 웅갈손을 보내 남국의 왕과 함께 은나라 땅에 여섯 읍을 설치하는 것을 살펴보게 하였는데, 은나라 사람들이 서로 싸우면서 결판을 보지 못하니 마침내 병력을 진격하여 이를 쳐부셨다.을유 2년, 남국의 임금 금달이 청구(靑邱)의 임금, 구려(句麗고리.코리)의 임금과 주개에서 회합하고, 몽고리의 병력을 합쳐 가는 곳마다 은나라의 성책을 부수고, 깊숙히 오지로 들어가 회.대의 땅을 평정하더니...은나라 사람들은 우리의 기세를 두려워 했다."

산동.양자강유역의 코리족이 정착하거나 본래 자기 터전(몽골지역.북경지역 청구)을 찾아서 북상했다는 의미가 된다. [환단고기]는 이처럼 우리 민족사의 고대사를 명확히 사실적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고고학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산동.양자강유역에는 단군조선의 유적.유물들이 많이 드러나고 있어 이러한 기록의 사실성을 증명되고 있다.

흑룡강은 이동하기 좋은 교통로었고 또 엄청나게 많은 물고기가 사는 식량의 보고이다. 평소에는 이동에 작은 보트를 썼을 것이고 겨울에는 결빙한 강위로 썰매를 이용했을 것이다. 러시아 민족의 시베리아 개발사를 읽어보면 겨울의 결빙한 강처럼 더 좋은 고속도로는 시베리아에 없었다.

[몽골비사]에 의하면 AD 8 세기경 코리 부족은 흑룡강 상류와 하류에 걸쳐 상당히 넓은 지역에 거주했었다. 후기의 연구에서도 이 지역에 고리국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부여가 길림.농안.장춘 지역에 있다고 했으니 북쪽에 있었던 이 지역은 부족국가 상태였을 고리국, 또는 고리족이 살던 북부여 (北夫餘)였을 것이 분명하다.

할힌골이 흘러 들어가는 보이르 호수는 지나국과 몽골의 국경을 이루는 경계선에 위치하며 몽골에서 세 번째로 큰 호수이다. 길이가 40킬로미터, 폭이 21 킬로미터이다. 마치 조개 같은 모양으로 실제로 호수에 많은 민물 조개가 산다. 보이르호는 오르숀 강을 통하여 헐런호로 물을 흘러 보내는데 이 헐런호는 흑룡강의 상류로 흘러가는 지류로 연결되어있다. 그래서 결국 보이르호는 흑룡강과 통한다고 하겠다.

보이르호 지역에 대리석으로 만든 석인상(石人象)이 하나 있다. 이런 지역 배경에 대해 지역의 노인들은 이렇게 증언해 준다고 한다.

저 석인상의 동쪽에는 고리 사람이, 서쪽에는 몽골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 곳 할힌골에는 살고 있는 고려인과 몽골인은 서로 내왕이 잦았고 서로 혼인을 하였다. 예컨대 초원에서 양부족의 여자들이 오줌을 누다 만나면 몽골 여자들은 왼쪽 손을, 고려 여자들은 오른쪽 손을 들어 흔들어 서로간에 우의를 표시했다. 고려인들은 할힌골에 성을 쌓고 살았다.그 성의 페허가 남아있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이곳에 오랜 세월 살지 않고 동남쪽으로 이동해갔다.”


▲ 고구려 성터

몽골에서는 한국을 솔롱고스라고 부른다. 그러나 보이르호 지역에서는 달랐다. 먼저 중국과 국경이 있는 몽골의 최 동단(東端)인 보이르호 지역에서는 1920년 몽골이 독립 할 때까지 한국(또는 조선)을 고올링고스라고 불렀다. 고올리(고구리=고구려)의 나라라는 뜻이다.

그때까지 솔롱고스라는 말을 들어보지도 못했다고 한다. 더해서 몽골학자에 의하면 이 지역의 주민들은 신체적인 조건이나 각종 풍속이 몽골에서 한국인들과 가장 유사하다고 한다.

한국과 몽골 학자들에 의한 이 할힌골 일대에 대한 탐사와 조사가 1992년도, 그리고 93년,94년 여러 곳에서 실시되었다.

여러 유적 중에는 1995년 6-8월까지 실시한 이루어진 숨팅토이롬 고올리 성읍터에 발굴에서는 고구려 석실 무덤 2기와 벽화 고분을 발굴하여 도깨비 무늬 숫막새 기와등의 고구려 유물이 많이 나왔었다.

고구려가 최대 강성할 때도 고구려 북방 경계선이 흑룡강지역일 수 밖일 수 있었던 이 지역에서 발견된 고리의 유적이 고구려의 것과 거의 같은 특징을 가졌다는 것은 고리와 고구려가 강한 유대가 있었던 관계임을 입증한 것이다.(몽골족은 성을 만드는 일이 드물다) 쉽게 말한다면 고리와 고구려는 같은 민족이라는 추측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 몽골화가 쳄벨도르즈의 그림, 마음속의 성산-부르칸 산

알랑고아 아버지는 사냥을 아주 잘했다는 것으로 보아 주몽처럼 화살을 매우 잘 쏘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동족 코리족이 사냥을 못하게 하여 씨족을 만들어 보르칸산으로 갔다는 설화 또한 동부여에서 북부여로 망명해 온 주몽이야기와 유사하다. 우리 민족사의 아리랑이다.


▲ 밝은 산(불함)이라 불렸던 백두산 모습. 촬영:백두산 전문 사진작가 이정수

그리고 알랑고아 아버지가 이동한 몽골의 부르칸산은 바로 한민족의 광명사상을 나타내는 밝은 산을 의미하는 백두산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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