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인물

스무번이나 임금이 하사한 관직을 거절한 명재 윤증 선생

H극동 2011. 1. 14. 00:01

우리 속담에는 '개천에서 용난다' 는 말이 있다.

그런데 교육열이 불타오르는 현대에는 '개천에서 용난다' 는 속담이

아스팔트에 붙은 껌만큼이나 단물빠진 말이 되어버렸다.

우리가 살고 있는 2011년은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다.

돈이 있어야 공부도 잘하고 돈이 있어야 로스쿨도 들어갈 수 있다.

 

너나할것 없이 출세해야 잘 사는 우리나라 좋은 나라.

그런데 이 좋은 출세를 거부한 사람이 우리 역사 속에 있었으니 그분이 바로 명재 윤증선생이다.

명재 윤증선생은 자그만치 스무번이나 임금이 하사한 관직을 거절하고

평생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던 인물로 백의정승이라는 칭호를 받은 인물이다.

 

딱 한번 벼슬을 받으러 서울로 올라가던 중에 과천에서 박세채를 만나

당시 시국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양으로 올라가지 않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일화가 있다.

제천에서 윤증 선생이 집으로 다시 발길을 돌린 것은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노론에 대한 불만이었다.

그 불만의 이유는 우암 송시열의 세도가 변하지 않을 것이고, 서인과 남인의 원한이 해소되지 않을 것이라는 

당대 정치 현실에 대한 불만 때문이다.

 

윤증선생은 인조 대에 출생하여 효종, 현종, 숙종까지 네명의 임금을 모셨지만,

왕의 얼굴을 한번도 보지 않고 정승 반열에 오른 유일한 인물이다. 

하지만 비록 벼슬길에 나가지는 않았으나 윤증선생이 당대 현실 정치에 끼친 영향은 막강했다.

 

명재 윤증선생의 생애를 논하면서 빠뜨릴 수 없는 사건이 바로

윤증 선생의 스승이었던 우암 송시열 선생과의 반목으로 지칭되는 회니의 반목(懷泥의 反目)이다.

즉 명재 윤증과 우암 송시열은 사제 지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상적 견해가 많이 달랐다.

그래서 두 사람은  정치적 노선의 반대편 수장이 되어 반목한다.

이를 회니의 반목이라 한것은

회덕에 살았던 송시열과 니산(지금의 노성)에 살았던 윤증의 반목이었기 때문이다.

 

송시열과 윤증은 모두 철저한 유교적 도덕정치를 내세웠다.

그러나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측은 현실과의 일정한 타협을 통하여 권력을 장악하려는 권력지향적 측면이었고,

윤증을 내세운 소론측은 현실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명분을 고수하며 개혁 정치를 펼치려는 측면이 강했다.

이런 점에서 두 사람의 정치적 견해는 서로 큰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숙종은 윤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유림에서는 그의 도덕을 존경하고 나 또한 그를 흠모하였네.

평생에 얼굴 한번 못 보았는데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더욱 한스럽도다."라는

내용의 시를 적어보냈다고 하니

윤증 선생의 인물됨이 얼마나 출중했는지 짐작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명재 윤증선생 초상화다.자신의 이익을 위해 불의와 절대 타협할것 같지 않은 강한 인상이다.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노성산 남쪽 자락에 자리한 윤증선생 고택이다.

설경에 쌓여 있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

지금은 이 집에서 종부와 윤증선생 후손들이 살고 있다.

하지만 윤증선생 고택으로 알려진 이 집은 실제 윤증선생이 살았던 집은 아니라고 한다.

 

윤증 선생은 인근 병사마을, 유봉이라 불리던 곳에

초가를 짓고 아주 청렴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 

윤증선생 말년인 1709년에

교촌리 현재의 집과 월명동의 종가가 함께 지어졌다고 한다.

 

 

 

윤증선생 고택은 대표적인 호서지방의 양반가옥 형태를 보여준다. 

이 고택은 조선시대 중기때 상류층의 전형적인 살림집이다.

건축물 남쪽에는 넓고 평평한 바깥공간이 있는데 그 곳엔 네모진 연못이 있다.

특히 대문에서 안채가 쉽게 보이지 않도록 배려한 것은

외부사람의 조심스런 접근과 내부사람의 독립성(privacy)을 고려한 완충적인 공간이다.

 

 

 

 

 

수납공간인 광채는 안채와 비껴서 배치하여 계절(비,바람...)적인 자연현상에 대비한 것은

이 댁에서만 볼 수 있는 주생활 공간의 세련된 지혜라고 생각된다.

예를들면 안채의 일조권 처리는 물론이고, 안채를 중심으로 한 광채와 사랑채의 일조권 처리 역시

계절적인 자연현상에 대비한 완벽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안채를 중심으로 광채와 사랑채의 기능적 배치는 윤증선생 고택에서만 볼 수 있는 건축적 지혜이다.

뿐만 아니라 채원과 정원 그리고 후원 속에 장독대는

실용성과 경관적으로 비교적 잘 처리한 조경적 지혜라 할 수 있다.

 

 

 

사랑채의 경우 (사진의 왼쪽 누마루 부분)공적인 공간으로 안채와 떨어져 독립성을 주면서도

안채와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는 것이 윤증선생 고택의 지혜이면서 멋이다.

 

출처- 현영조(이학박사):전통문화연구원 요철요-

 

 

 

현재 윤증고택에 살고 있는 후손은 종가의 비법대로 장 담그는 일을 하며 고택을 지켜가고 있다.

고택 밖으로 쭈욱 늘어선 장항아리들이 아름다운 곡선미를 자아낸다.

 

윤증고택에 가서 보았던 것중에 인상 깊었던 한가지는 바로 장 항아리에 붙여놓은 버선본이었다.

궁금해서 여쭤봤더니 혹여 장맛이 안좋으면 빨리 제 자리로 돌아오라는 뜻과 함께 또 장 항아리 주위로 접근해 온

나쁜 균들이 다 버선본속에 빠져서 나오지 못하게 한다는 뜻도 담겨 있었다고 한다.

고택에서 보는 풍경 하나 하나가 다 예술이고 지혜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항아리들이 꼭 똑 같은 모자를 하나씩 맞춰 쓴 것처럼 함박눈을 옴팍 뒤집어 쓴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

 

 

 

대대로 내려오는 종가의 장맛이 참으로 궁금하다.

하긴 예로부터 집안의 음식맛은 장맛에서 비롯된다고 했으니 종가의 장맛이야 말로

명품중에 명품이 아니었을까 싶다.

 

 

 

윤증 선생의 후손인 윤완식씨가 종가의 비법 그대로 만든 된장과 간장이다.

윤증 고택의 간장과 된장맛을 본 사람은 절대 다른 된장 간장을 먹을 수 없다고 하니

한번 먹고 입맛 버렸다가는 영락없이 윤증고택에서 나오는 된장 간장을 사 먹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윤증선생 고택을 둘러보고 나오면서 선생의 정치적 사상과 올곧은 신념에 대해 생각을 정리해본다.

자신의 출세보다는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면서도 올곧은 정치적 신념을 끝까지 지켜냈던 명재 윤증 선생한테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화두가 무엇인가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사실 윤증선생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도 쓰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지만 다 하면 글이 장황해질것 같아 고택을

소개하는 정도로 맺어야 할것 같다.

 

윤증고택은 숙박과 숙식체험이 가능하다. 고택 체험을 위해 알아두면 좋은 내용들을 정리해 본다

 

방문 및 답사 시는 사전에 예약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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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약을 하시면 고택에 관한 유래나 해설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예약을 하시면 다례[茶禮]를 하실 수도 있습니다

고택은 후손이 직접 살고 있으니 예의를 지켜주시고, 사전에 출입 허가를 받고 관람하시기 바랍니다.

고택은 개인 및 국가의 재산이므로 손상되지 않게 관람해야 합니다.

관람 시에는 환경보호 규칙을 준수하는 시민이 됩시다.

어린이와 동행 시는 각별히 신경을 써서 다치거나 기물 파손을 사전에 예방하여 주십시요